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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문과 시행문
  • 김 완
  • 승인 2022.03.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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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한장 칼럼16)

학교가 가장 바쁜 3월이다. 업무포털 화면에 공문서가 빼곡하다. 눈대중으로 제목들을 훑어보며 결재를 하다가 마우스 위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갑자기 멈춰섰다.

‘제목-도서선정위원회 협의 결과’, ‘본문-2022학년도 본교 도서선정위원회 협의 결과는 붙임과 같습니다.’ 붙임 문서를 클릭했더니 100여권의 도서가 나열돼 있었다.

멈추어 선 검지손가락 끝에는 모호한 나의 생각과 입장이 함께 머물러 섰다. ‘결재를 하면 이 공문서는 무슨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위원회에서 선정한 도서목록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잠시 이 공문서에 관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도서선정위원회는 협의를 거쳐 도서를 선정했다. 공문서를 작성한 업무담당 교사는 선정한 도서가 이렇다는 것을 검토자와 결재권자에게 알렸다. 검토자는 그 내용을 인지했음을 결재를 통해 표현했다. 최종 결재권자가 결재를 하면 그도 내용을 인지했음을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선정된 도서는 구입해야 할까?’ 

이 공문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의문을 갖게 한다. 첫째, 결재과정을 통해 어떤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는가? ‘내부결재’는 기관이나 조직 안에서 어떤 과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이다. 협의회는 협의회대로, 실무자, 검토자, 결재자 모두 자신의 역할을 했지만 아무것도 결정된 사항이 없다.

둘째, 2022학년도 선정된 도서는 구입해야 하는가? 실무자, 검토자, 결재자 누구의 의견도, 결정도 없으니 일 또한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셋째, 2022학년도 학교도서구입에 대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제안한 사람도, 결정해 준 사람도 없으니 2002학년도 도서구입에 대한 책임 또한 모호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1980년대 초반에 교직에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교사인 나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먼저 주어진 일은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까마득하게 많은 경력을 가진 선임 선생님이 맨 처음 가르쳐 준 것은 ‘기안지와 시행지’라는 용어였다. 

기안지는 학교 내부에서 어떤 업무를 계획하고 결정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고, 시행지는 대외로 발송되는 공문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당시는 어떤 규정에 의해 공문서가 작성되는지, 문구들은 어떤 생각으로 기술해야 하는지 비판적으로 사고할 의지도 실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선임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그대로 인지하고 흉내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작성한 문서들이 학교의 교육 내용과 방법이 되고, 아이들을 통해 구현되는 것에 신기해 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지나 경력이 쌓이고 스스로가 선배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공문서에 대해서 보다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더욱이 교육전문직으로 전직해 오랫동안 일하면서 공문서 쓰기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 됐다.

매일매일 수많은 공문서를 작성하고 접하면서 그 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공문서 작성의 기본이 되는 규정은 대통령령으로 제정한 ‘행정 효율과 촉진에 관한 규정’과 행정안전부령으로 제정한 ‘행정 효율과 협업 촉진에 관한 규정 시행규칙’이 있다. 실무자들이 친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는 위의 규정과 규칙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행정안전부에서 발행한 ‘행정업무운영편람’이 있다.

이들 규정과 편람은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 행정서비스의 질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공문서에 관한 이 세 가지 문서에는 공문서의 정의에서부터 작성, 처리 등 세밀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치밀한 규정과 편람에도 불구하고 실무자와 결재권자가 기안문과 시행문을 작성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기안문이 문서로서 완성되려면 기안자의 기안-중간 관리자의 검토- 최종 결재권자의 결재라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키워드는 ‘기안’과 ‘결재’이다. 기안은 사업이나 활동 계획의 초안이고, 결재는 결정할 권한이 있는 상급자가 실무자가 제출한 안건을 검토해 승인하는 것이다. 실무자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결재권자는 결재를 함으로써 그 업무나 사업을 결정·시행하고 결과에 공동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안문에는 반드시 업무담당자의 의견이 들어 있어야 하고 그 문장의 종결 문구는 ‘~~하고자 합니다’가 돼야 자연스럽다. 이런 관점에서, 이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제목-도서선정위원회 협의 결과’, ‘본문-2022학년도 본교 도서선정위원회 협의 결과는 붙임과 같습니다.’는 ‘제목-2022학년도 도서구입 계획’, ‘본문-도서선정위원회의 협의 결과, 붙임과 같이 도서를 구입하고자 합니다.’ ‘첨부: 도서선정위원회 선정도서 목록’이 바람직하다. 

시행문은 타기관이나 부서로 발신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다. 이를 작성하는데 유념해야 할 것은 문안을 작성하는 주체를 실무자로 할 것인지 결재권자로 할 것인가이다. 시행문은 작성 기관의 결재권자가 수신하는 기관의 책임자에게 보내는 문서다. 따라서 시행문을 작성하는 실무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글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 결재권자의 입장에서 문서를 작성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청계북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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