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싫다! 이놈아"
상태바
"싫다! 이놈아"
  • 이기홍
  • 승인 2024.03.26 13: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기홍∥前 목포교육장

‘싫다! 이놈아.’ 살가운 말이 아닌데도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외려 정까지 든다. 한 발 나아가 조그만 더 있으면 좋아질 것 같다는 말로도 들린다. 왜일까. 우리들이 너무나 가식적인 말을 주고받는 일에 이골이 났기 때문은 아닐까.

쉽게 말하면 다 알아들을 일을 빙빙 돌리고, 애써 에둘러 말하고, 그래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우리들의 일상을 비춰보면 이런 뚝 부러진 표현에 갈증이 난 나머지 오히려 정까지 드는 것은 아닐까.

‘싫다! 이놈아.’는 판소리 열두 마당 수궁가 중 별주부가 토생원을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다. 남해 용왕이 새로 궁전을 짓고 축하연을 열다 과음을 했는데 우연히 병이 들게 된다. 홀연히 도사가 나타나 토끼의 간이 약이 된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그러자 대신들이 어전회의를 개최해 토끼의 간을 구하는 방도를 찾는다.

주부 자라가 나서며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간청해 용왕이 허락하자 별주부(鼈主簿) 모친이 삼 대 독자가 어딜 가느냐고 말린다. 아내는 몸성히 잘 다녀오라 인사를 하는데 별주부는 아내가 뒷집 남생이와 눈이 맞을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길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토끼를 만난 별주부가 갖은 감언이설로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리고 가려고 수작을 벌렸으나 토끼가 마지막에 토해낸 말이 ‘싫다! 이놈아.’이다. 

우리들은 특히 나 같은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싫다! 이놈아.’가 얼마나 어려운 표현인지 너무나 잘 안다. 내 마음을 솔직히 직설적으로 표현했을 경우 그다음에 올 후폭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바로 말하지 못하고 짐작해 알아듣도록 돌려서 말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완곡 화법이라 하는데, 에둘러 말하면 상대의 면(面)을 손상시키지 않고 상대에게 공손함을 나타내는 말하기 방법이다.

나 역시 오랜 공직생활 동안 상사분과 말을 주고받을 때는 살얼음을 딛는 심정으로 조심했다. 자칫 내 말로 인해 상사분의 기분이 상하게 되면 내 미래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승진해서는 힘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대와 달리 구성원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기 위해 완곡하게 말하는 것을 피해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 말이 세련되고 곱다고들 했지만 기실은 상사와는 의견 충돌을 예방하는 처세술로 이용되었고, 구성원들에게는 단수 높은 거드름 피우기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에둘러 표현한 말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상사분이 형편없는 강의로 수강생들에게 지루함을 줄 때는, ‘강의가 너무 수준이 높다 보니 해석이 따라오지 못합니다’라고 표현하고, 구성원이 일을 잘못 처리하여 민원이 제기되면 ‘인기가 아직도 식을 줄 모르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는 ‘젊잖하신 말씀이십니다.’라고 피해 갔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라는 말로 죽음이란 표현을 피해 갔고, ‘마음이 아픈 사람’이란 말로 정신병자란 말을 건너갔다. 화장실 가면서 큰일 보러 간다는 말은 자주 썼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직설적인 화법이 애용되고 있다.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호불호를 밝히는 그들의 행태에 놀라움을 넘어 부러움 마저 느낀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며 최단거리로 쏘아붙이고, ‘니가 없어도 남자는 많아. 갈 테면 어서 가라지.’라며 시원하게 뒤통수를 친다.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상대를 배려한 것 같지만 기실은 감정을 손상시키는 사실상의 이기적인 처세술이자 결국에는 음흉하고 교활하다는 느낌을 주고 마는데, 만일 그 옛날 이런 ‘싫다! 이놈아.’와 같은 화법이 일상화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싫다! 이놈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