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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 1日, 과연 우리의 국군의 날인가?
 나동주∥前영광교육장
2019/09/16 11: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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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3월, 민족주의자들의 단일 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한 김구에게 건장한 대한의 두 청년이 피로써 죽음을 맹세한 것은 8년 전인 1932년의 일이었습니다. 두 영웅의 이름, 이봉창과 윤봉길입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義士)는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궁성으로 들어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인(日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는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열린 일왕(日王) 생일 축하 및 상해 사변 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민족 침략의 원흉인 일본인 다수를 사상케 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목숨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애국의 참모습을 전세계에 장렬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세계 여러 나라 피압박 민족들에게 불같은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이 두 의거를 바라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는 수 억 명의 중국인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으니, 이는 훗날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계 역사상 자기 나라 군대를 다른 나라에서 창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김구 주석은 장제스를 찾아가 당시 나라 잃은 설움과 광복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며 중국에 우리나라 군대 창설을 허락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제스의 관리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나섭니다. 그 때까지 우리 독립군들은 잘 훈련된 정규군이라기보다는 게릴라식 전투를 주로 하는 비정규군이었으며 막강한 일본군에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정규군인 우리나라 군대 창설은 대단히 시급하고, 숙명적인 과제였던 것입니다.


이에 장제스는 많은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라 중국에 대한민국의 군대 창설을 허락하고 맙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대단한 결정을 내린 장제스는 반대만을 일삼은 관리들에게 이렇게 일갈(一喝)합니다.


“우리 중국은 과연 이봉창과 윤봉길을 가졌는가? 우리에게 그들이 없다면 그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대한민국의 군대는 이 중국 땅에 창설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숭고한 넋을 오래도록 기릴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의 의거는 세계 만방(萬邦)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는 우리나라 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승화됩니다. 당당하게 입을 다물고 사형을 기다리는 윤봉길의사의 최후의 모습이 더욱 가슴 절절히 아려오는 이유는 이처럼 숭고한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진리를 다시금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그 날 1940년 9월 17일, 김구 주석은 우리나라 군대인 ‘광복군’을 정식으로 창설하고 독립군들의 체계적인 훈련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1년 12월 9일, 낙하산 부대까지 포함한 대한민국 광복군의 이름으로 일본을 향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비극인 6·25사변이 일어납니다. 밀물 듯이 쳐들어오던 공산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를 통한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우리 군과 유엔군에 의해 격퇴 당하고, 드디어 1950년 9월 27일 해병대원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하루 뒤인 1950년 9월 28일 잃었던 서울을 완전히 수복(修復)합니다. 승승장구하던 우리 군은 급기야는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우리의 백골부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되니, 이 날이 바로 1950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상쟁의 비극인 6·25사변 당시 38선을 넘어 북진(北進)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인 이 날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여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전쟁 사상자를 그리고 혈육 단절의 아픔을 겪는 1,000만 이산가족을 양산한 이 비극적인 민족사적 전쟁에서 단지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반세기가 넘는 오늘까지도 이 날이 우리의 국군의 날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남북이 한 핏줄임을 인식하고 평화와 번영을 통한 동반자적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 지금까지도 이 날이 과연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군의 날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처럼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에 창설된 우리의 군대인 광복군 창설일이 당연히 국군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이 되어야 하듯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은 당연히 9월 17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들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우리 후손들의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자랑스런 우리의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 날이 진정한 우리의 국군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늘 메아리가 없습니다. 허공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새롭게 지정한다면, 결국 1941년 12월 9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당시의 결연한 의지 그대로 그 생명력이 온전히 유효할 것입니다. 독립전쟁에서 경제전쟁으로 바뀌었을 뿐, 일본을 향한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배척은 오늘날에도 조금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작금의 사회적 현상이 이러한 역사적·민족사적 의의를 온전히 내포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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